거절과 선택은 동전의 양면이다. 현실적인 상황에서, 제한된 시간과 그 외의 자원을 이용할 때에 하나를 선택한다면 다른 하나를 거절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곧, 거절 의사를 밝히던지 결론적으로 거절을 한 게 되던지, 거절의 대상이 타인이던지 나 자신이던지... 예를 들어, 문서 한 장 정도이니 한 번 작업해 달라고 하는 누군가의 부탁에 시간을 할애하기를 선택하는 순간 그만큼의 시간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에는 거절을 하는 셈이다. 그 시간에 운동이나 공부를 해서 자신에게 투자를 하는 미래에 대한 거절,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서 쌓을 수 있는 정서적인 유대감에 대한 거절, 그 시간에 만들 수 있는 수익에 대한 거절. 이렇게 잃는 게 훨씬 많은데도 거절을 못 하기 때문에 고스란히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이유는 무엇일까? 거절에 대한 자신만의 철학이 없을 때는 선택만큼 아니 선택보다 훨씬 어려운 것이 바로 이 거절이다. 거절의 중요성이나 테크닉적인 표현 방법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지만, 스스로 체득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면 삶에 실제로 적용을 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 나 같은 경우 안되요, 아니요, 할 수 없습니다… 이런 말을 절대 못 하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거절을 할 바에야 그냥 몸으로 때우고 마는 스타일로 사는 게 참 피곤한 타입이었지만 이제는 거절을 해도 내 삶에 큰 지장이 없고, 거절이란 건 굉장히 안전할 수도 있다 라는 확신이 생겼다. ^^ 아무리 생각해도 다 명상 덕분인 듯 하다. 명상…? 명상은 자기 돌아보기이다. 자기를 돌아본다는 것은 참 좋은 것이다. 가족 소개로 명상을 하게 되었는데 그 당시 나는 몸과 마음이 모두 지친 상태였다. 나는 사람을 참 좋아했다. 주변에 사람이 많은 걸 좋아했고 주변 사람들이 날 좋아하면 그게 사는 힘이 되었다. 다만, 가끔씩 무리가 될 정도로 사람들을 챙기거나 부탁하는 일을 해 주는 일도 많았다. 그리고서는 그 상대방과 마음이 맞지 않을 때는 종종 서운함을 느끼기도 했다. 내 주변에 사람들이 나를 좋은 사람이라고 평해 주는 게 나에게는 굉장히 중요했기 때문에 거절을 한다는 게 정말이지 너무 어려웠다. 하지만 가끔 이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내가 정말 원하는 게 무엇일까? 사람이 좋아서, 친한 친구를 잃고 싶지 않아서, 자기밖에 모른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서 굉장히 노력을 했다.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을까? 원하던 대로 주변에 사람들은 많았고 나를 안 좋게 대하는 사람도 많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이게 정말 내 인생에 중요한 것일까 생각하면 그건 아니었다. 한 번밖에 없는 삶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만큼이나 중요하고 거의 평생 동안 살아오던 방식이 바로 거절 안 하고 두루두루 잘 지내는 것이었으니, 시간이 지나면서 내적인 갈등이 점점 커졌다. 게다가 가끔씩 내가 선을 긋지 못해서 부탁을 습관처럼 하는 상대방을 만나게 되면 그 상대방을 대하는 것도 힘들었지만 거절도 못 하고 가끔씩 거절하고는 끙끙 앓고 하는 내 모습에 더더욱 지쳐갔다. 내가 거절을 못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남을 신경쓰는 것 때문이었다. 내가 거절해서 이 사람이 날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어떻게 하지? 그걸 다른 사람들에게도 말하고 다니면 어떻게 하지? 정말 좋아하는 친구를 잃게 되면 어떻게 하지? 그래서 다른 친구들도 날 떠나면 어떻게 하지? 이런 생각들을 평소에도 굉장히 많이 했고 거절을 해야 하는 타이밍에는 이런 생각들이 불쑥불쑥 떠올랐다. 내 시간도 소중했고 상대방도 소중했기 때문에 모두 지키고 싶었지만 현실적으로는 이 둘 다를 지키는게 대부분 가능하지 않았다. 내 스스로 절충이 필요했지만 그런 지혜를 얻는건 나에게 아득히 멀게만 느껴졌다. 마치 에베레스트 등반처럼,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나에게 아마 500년이라는 수명이 있다면 한 380살 쯤 되면 어쩌면 가능할 일 정도…? 그러다 명상을 하게 된 이후에 멀게만 느껴지던 일들이 차츰 현실화되기 시작했다. 마음수련이라는 명상이었는데 이 마음수련의 실체는 빼기이다.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스트레스 또는 부정적인 마음을 하나씩 빼기해서 마음을 비우는 것이다. 스트레스의 요인이 되기도 하는 흔히 좋다고 생각되는 마음도 빼기하게 되는데, 나같은 경우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빼기하면서 마음이 굉장히 가벼워지고 삶도 심플해졌다. 짐을 내려놓고 나니까... 명상실에 가서 의자에 쿠션을 놓고서 편안한 자세로 앉으면 그것만으로도 나에게 힐링이 되었다. 혼자서 안절부절 못 하던 고민거리… 별 것 아닌 듯 해도 쌓이고 쌓여서 큰 짐이 되었고, 현실적인 해결책도 찾지 못 해서 이 부분만 생각하면 항상 암담했었다. 그런데 명상실에 앉으면 이걸 다 빼기 할 수 있어서 위안이 되고 또 힘이 되었다. 실제로도 내가 소중해서 잡고 있는 것들을 하나 둘 씩 놓는 지혜가 생겼다. 예전에는 놓는다는 것이 될대로 되라지 라는 무책임한 것인 줄 착각했었다. 그런데 자기를 돌아보고 내가 쥐고 있는 것들, 신경쓰고 있는 짐들이 마음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바로 놓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나서 느낀 자유는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이다. 주변에서 날 뭐라고 생각할지 항상 신경쓰고, 친구들을 잃으면 큰 일 날 것 같고, 다 잘 해야 하고 하는 것들을 나도 모르게 놓게 되었다. 그리고 생각했던 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주변에서 날 대하는 태도가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역시나… 내가 남들을 신경 쓴다고는 했지만 정확히 말하면 남들이 생각하는 나를 신경쓰고 있었다. 그러니 결국에는 나에 대해 신경쓰고 있던 건데, 남들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그들의 모습이 어떨지 신경쓰느라 나에게는 그리 큰 관심이 없었다. 그걸 받아들이는 데에는 경험치가 필요했다. 정말 남들이 나에 대해 신경을 안 쓰고 거절해도 나에게 큰 타격이 없다고? 실제로 거절을 몇 번 해보니까 놀라울 정도로 타격이 없었다... 마음을 놓게 되니까 여유있게 내 한계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할 수 있는게 있고 할 수 없는게 있는데 할 수 없다고 얘기하는 게 더 진솔한 거 아닌가? 라는 마음으로 대화를 풀어가니까 내가 머뭇머뭇해서 오히려 신뢰성이 없던 것도 이제는 확실한 사람으로 인식되고 관계가 오히려 담백해지고 서로 편해지게 되었다. 친구들은 더 했다. 친구들에게 거절을 하기 시작했을 때는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겼다. “네가 안된다고 하니까 우리가 진짜 친구가 된 거 같아.” 친구들은 이미 내가 거절 못 하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항상 내게 제안을 할 때에 “안되면 안된다고 말해달라”고 항상 이야기를 해왔었다. 나는 그게 나한테만 하는 말인 줄 모르고 예의상 모든 사람들에게 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그게 거절 못 하는 나한테만 콕 집어서 얘기해 주는 그들의 배려였던 걸 거절을 시작하고서야 알게 되었다. 친구들의 배려에도 항상 거절도 못하고, 부르는데 다 나가려고 하고, 해달라는 거 다 하려고 하고… 사람이 그걸 다 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마음에서 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항상 있으니까 하건 안 하건 항상 스트레스가 됐다. 친구들은 다 알고 있었지만, 내가 거절 못 하는 걸 그들이 어떻게 바꿔줄 수는 없는 거니까 그들 나름대로 최선을 다 하면서 함께 관계를 이어가고 있었던 거다. 그래서 내가 안되는 건 안된다고 말하기 시작하니까 생각지도 못했던 수혜자가 친구들이 된 셈이랄까. 친구들이 그렇게 진심으로 응원해 주는 걸 보면서 참 아이러니했다. 내가 잘 한다고 한 일이 그들에게 부담이 됐을 줄이야. 거절하기 전에 바로 잡은 것 그리고 거절은 단순히 거절이 아니라 어렵다. 나에 대해 잘 알고 내 중심이 바로 서서 내가 가치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우선 정리되어야 한다. 그 후에야 매일매일 겪는 선택과 거절의 기로에서 바른 판단을 내릴 확률이 높아진다. 판단을 할 때에는 평상시 하던 생각이 반영되는데, 명상을 하기 전에 나는 소중한 것들을 잃는 두려움을 항상 갖고 있었고 평상시에 이런 두려움이 반영된 판단을 주로 하고 있었다. 명상 후에는 두려움의 뿌리가 되었던 거절감, 의존감이 사라지니까 나라는 사람의 본질에 대해서 더 이해하게 되었고 그게 중심을 잡는데에 직접적인 힘이 되어준다. 나의 가치관에 대해서 떳떳하고 그걸 지켜나가는 것, 성장시키는 데에 더 많은 에너지를 쓰게 되었고 장기적으로 볼 때에 나에게 더 나은 결과를 안겨주는 경험치가 쌓이고 있다. 여전히 거절이라는 것은 쉽지만은 않다. 하지만, 이제는 명상실에 앉아 명상을 하고 나면 나를 더 깊이 이해하고 더 성장할 수 있는 기회로 삼을 수 있는 긍정적인 마음의 힘을 얻는다. 그게 바로 마음수련의 실체이며 이로 인해 현실적인 문제들을 지혜롭게 풀어나갈 수 있게 된다.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대안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1905~1980년)는 '삶이란 B(Birth)와 D(Death) 사이의 C(Choice)다'라고 말했다. 아마 삶이란 탄생과 죽음 사이의 거절에도 맞닿아 있지 않을까. 거절과 선택은 동전의 양면이며, 거절은 우선순위를 선택하는 또다른 방식이다. 나의 우선순위를 선택하기 위해 지금의 제안에 대해 시간조정을 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위임할 수도 있고, 나의 우선순위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는 사람에게는 어디에 선을 그어야 할지 알려주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을 알고 내 중심이 바로 서야만 이런 테크닉적인 면을 자연스럽게 활용할 수 있게 된다는 점이다. 무엇이든 짐이 되서는 안 될 것 같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명상을 통해 현실적인 문제들을 자연스럽게 해결하고 성공의 경험치가 점차 늘어나는 삶을 살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마친다. photo credit
@marcschaefer @yogimadhav @wildlittlethingsphoto @jakegivens from unsplash #거절하는방법 #거절못하는사람 #거절의기술 #거절 #선택 #명상 #마음수련 #실체 #거절의노하우 Click here to edit.무기력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표준국어대사전) 무기력(無氣力) 어떠한 일을 감당할 수 있는 기운과 힘이 없음. 살면서 무기력해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금방 괜찮아 지기도 했지만 가끔씩 한 두달씩 지속되는 경우도 있었다. 의욕도 없고 하고 싶은 것도 없고 일이 잘 되도 시큰둥하고 잘 안 풀려도 전혀 관심이 없다. 나도 고생이고 주변 사람들도 고생인 무기력. 명상을 하고 나서는 무리하지 않으면서 편안하게 벗어나게 되었다. 명상이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도록 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무기력의 이유 사람은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을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만큼 잘 알아차리기 어렵다고 한다. 명상을 하면 자신을 훨씬 더 객관적으로 되돌아 볼 수 있기 때문에 예전에는 이해할 수 없었던 자신에 대해 더 잘 알게 된다. 마치 한편의 영화를 보는 것처럼 나라는 캐릭터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볼 수 있어서 풀리지 않았던 일들이 도대체 왜 일어나게 됐는지 알 수 있다. 객관적으로 돌아보니 내가 무기력해지는 이유는 일정했다. “규율” 내가 바꾸거나 피할 수 없는 대상이 내 의지에 반대되는 행동을 지속적으로 하게 하면 나는 무척 무기력해졌다. 처음에 눈치채지 못했을 때는 내 마음대로 계속 하다가 직접적인 제지를 경험하게 되면 스트레스를 엄청 받았다. 그리고 내가 어떻게 바꿀 수가 없고 받아들여야 하는 운명(!)이라는 걸 인지하는 순간부터는 엄청난 무기력에 빠져서 세상 다 산 사람처럼 되고 아무 것도 하기 싫어했다. 손가락 하나 까딱 할 힘이 없게 되었는데 사람들에게 이유를 말하면 도무지 이해를 못한다고 느껴져서 점차 내가 왜 그렇게 무기력에 빠지게 됐는지 말하기 싫어지게 됐다. 자신 스스로 해결하기 힘든 일을 외부에서 오는 도움도 거부하게 되어버려서 나의 무기력은 한 번 찾아오면 정말 헤어나오기 힘든 경우였다. (그 외에도 무기력해지는 이유는 수없이 많았지만 ^^;;; 위의 이유에 비하면 일기를 쓰거나, 책을 읽거나, 동기부여 비디오를 보는 스스로의 노력으로 벗어나는 것이 가능했다.) 그렇다면 나는 왜 그렇게 규율이 싫었던 것일까? 기억은 하지만 그 기억이 더 이상 나를 헤치지는 못해 솔직히 무엇이 나를 심각한 무기력에 빠지게 하는지 정확하게 이 일 때문이야그 사람 때문이야내가 그때 그런 실수를 해서야라고 콕 찍어서 말하기는 굉장히 쉽지만 그러고 싶지 않다어떤 사건이 누군가의 삶에 생길 때에 그 전까지 내가 어떤 환경에서 살아오고어떤 기준을 갖고또 어떤 편견 또는 무지를 안고 살았느냐 에 따라서 똑 같은 사람이나 상황을 사람들은 다 각각 다르게 해석하여 그 영향을 받게 된다그 중에서 한 두가지 요인으로 어떤 일이 일어났다고 하기에 삶에는 정말 많은 요소들이 있다 그래서 명상을 하면서 어떤 사건과 사람들을 겪고 어떻게 해석하고 반응하게 되어서 이토록 무기력에 취약한 사람이 되었는지는 충분히 알게 되었다그게 큰 의미는 별로 없었다다만 명상을 한 후에 자신을 이해하는 폭이 넓어졌고 스스로를 인정하고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무기력에 빠져서 이렇게 무기력에나 빠지는 나는 정말 싫다라고 더 이상 자기를 필요 이상으로 탓하거나 거부하지 않고 오죽 힘들면 이럴까무슨 일이 있으면 그냥 좀 쉬기도 하자라고 여유를 갖게 되었다 명상을 하면서 그런 여유가 생기니까 보다 깊이 있게 내 마음의 실체를 볼 수 있었다예전에는떠올리면 기분 나빠지니까 마음 한켠에 스윽 밀어놓고서 내내 찝찝했던 기억들을 담담하게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그 때 그랬던 나를 떠올리면서 더 이상 이불속 하이킥을 하면서 감정 속에 빠지지 않고 그저 담담히 바라보며 아그런 일이 있었구나그때 내 기분이 그랬구나당연하지 그럴 때는 당연히 화가 나지화 좀 더 내지 그랬어그 때 견뎌내느라 정말 애썼어수고했어라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참 신기한 게 아무리 잊으려고 노력해도 안 되고평정심을 찾으려고 해도 한숨이 절로 나오던 순간들을 점차 다른 시각으로 인지하게 되었다뭐랄까내 마음속에서 엄청난 힘을 갖고서 나를 좌지우지 컨트롤하던 결 하나가 마른 지푸라기처럼 중심도 없고 힘도 하나 없고 존재감도 없는 것이 되어서 마침내 없어지게 되는 듯 했다그게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던 어떤 기억이자 마음 같은 것이었는데그 마음의 실체가 사라져 버린 거다 그 실체가 사라지니 처음에는 마음이 텅 빈 것 같았다보통 마음이 빈 듯 해서 공허하고 헛헛한 것과는 좀 달랐다그럴 때는 대개 쇼핑을 하거나 뭘 먹곤 했는데 이번에 마음이 텅 비었을 때는 다사다난하고 복작복작한 곳을 떠나 탁 트인 바닷가에 가서 수평선을 바라볼 때 느껴지는 자연의 광활하고 위대한 고요함 같은 것이 마음에서 느껴졌다더 이상 위로하거나 다독여야 할 과거의 나도 없었고 상처받고 힘들고 불공평하고 억울함을 느끼게 하는 상황이나 사람들도 모두 다 떠나가고 아무 것도 남지 않은 공백의 상태리셋되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아주 깨끗한 상태가 된 듯 했다 마음을 비우고 나면 나는 더 이상 과거의 덫에 걸려있는 내가 아니야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지금 당장은 바뀐 거 같아도 똑 같은 상황이 오면 똑같이 반응하는게 사람인 듯 하다그런데 명상이라는 게 똑 같은 상황은 다르게 바라보게 하는 건 사실이다규율을 지켜야 하고 나를 통제해야 하고 이런 상화이 오면 부정적으로 상황을 인지하고 무기력에빠지고어떨 때는 몇 달이고 헤어나오지 못 해서 나도 지치게 하고 주변 사람들 다 지치게 해서 사는게 고단한 적이 많았는데명상을 해서 마음이 텅 비워버리고 나니까 똑 같은 상황이 다르게 느껴졌다어떤 규율이나 제지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었다여유를 갖고서 보니까 상황에 필요해서 있는 규율일 때가 참 많고 그것에 대해 그렇게 애쓰면서 생각할 일이 아닌 경우가 많았다그리고 내가 바꿀 수 없는 부분에 대해서 지나치게 연연하는 것을 멈출 수 있게 되었다필요할 때에 적당하게 할 수 있는 만큼 내 의견을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무엇인가 하고 싶은 상황에서 못 하게 되었는데 왜 무기력해지지 않고 좌절감도 느끼지 않고 아무 일도 없이 그냥 삶이 계속 되는지 가끔 너무 신기하다그러다 보니까 사는데 큰 문제없이 살아지고 그게 쌓이다 보니까 사람이 어느 부분에서 굉장히 미성숙한 부분이 있었는데 그런 부분이 조금씩 누그러지고 사람이 좀 철이 들면서 자연스럽게 성숙해 지게 되는 듯 하다그 모습이 낯설지가 않은게 아마도 원래 그렇게 살았었어야 됐는데 내가 괜히 무기력해지는 시간이 많으니까 그만큼 성숙할 수 있는 시기를 놓쳤던 것 같기도 하다 다른 사람들은 그냥 이러고 사는구나내 마음 속에 맺힌 게 있어서 그거 때문에 내가 사서 고생을 하고 살았던 거다누구든지 가장 멋있는 모습베스트 버전으로그리고 가장 성숙한 모습으로 활짝 펴서 사는게 진짜 사람 사는 게 아닐까 싶다내가 했던 명상인 마음수련의 실체는 자신의 가장 미성숙한 부분을 한꺼풀 벗겨내주고 본연의 모습이 드러나서 가장 성숙하고 진실된 모습으로 살게 해주는 거라고 느껴진다마음 속에서 화석처럼 딱딱하게 굳어서 한자리 차지하면서 삶을 어지럽히던 부정적인 마음이 눈 녹듯 사라지고 나니 나도 모르던 내 진짜 모습을 찾게 되어 보다 건강한 시선으로 나 자신과 내 삶을 바라보고 설계할 수 있고 그에 따라 살아갈 수 있는 마음의 힘이 생겼다힘든 일이 아예 없지는 않지만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인 명상이 있으니까 평정심을 잃지 않고 그냥 살아간다그러면서 성숙해지는게 느껴진다 성장은 자연스러운 과정
너무 힘들게 애쓰지 않고 받아들일 건 받아들이고 놓을 일들은 놓으면서 사는 중에 받은 선물이 있다자연스럽게 성장하는 삶이다삶을 살아가면서 누구든지 성장하는게 당연한데 자신의 발목을 잡고 있던 과거의 틀에 사로잡혀서 굉장히 미성숙한 어느 모습혹은 굉장히 아픈 모습을 안고서 쓴 인내를 하느라 성장을 할 수가 없는 경우가 왜 없겠는가명상을 하면서 마음을 깨끗이 비우면 본연의 모습과 조우하는 순간이 오고 그 존재만으로 빛나는 시기가 찾아온다한 명 한 명이 모두 소중하다는 말을 실감할 수 있고 내가 나로 존재하기에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감사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오늘도 명상을 하면서 그 감사를 느끼면서 하루를 편안하게 마칠 수 있어서 참 다행이다 워라밸이란?
‘워라밸’이란, 일과 삶의 균형을 뜻하는 영어의 ‘워크 라이프 밸런스(Work-Life Balance)에서 온 말이다. 1970년대 후반 영국에서 개인의 업무와 사생활 간의 균형을 묘사하는 단어로 처음 등장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최근 주 52시간 근무제 시행으로 부쩍 많이 들을 수 있는 신조어이다. 최근에는 고용노동부에서 최초로 지역별 워라밸 지수를 발표하기도 했다. 시스템이 가져다 주는 혜택은 무척 크다. 생활이 전반적으로 바뀌면서 삶의 질을 돌볼 수 있게 해주었다. 하지만 마음은 여전히 빨리 그리고 많이 업무량을 소화해야 하는 패턴에 젖어 있어서 워라밸이 삶에 녹아들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나는 일과 삶의 균형을 항상 원했지만 생황이 그것을 따라주지 못했다. 원인을 항상 급한 마감이나 과도한 업무량 탓을 했었는데 실은 내가 갖고 있는 일과 삶의 가치관이 내 삶을 항상 일에 쫓기게 하고 있었다. 그것을 인정하고 본질적인 변화를 하게 해준 데에는 명상이 큰 영향을 끼쳤다. 처음 관찰했던 직업관
명상은 자신을 돌아보는 것으로 시작한다.
내 삶을 어릴 때부터 돌아보니 직업, 일에 대해서 처음으로 개념이 생기기 시작했던 것은 아빠를 통해서였다. 1940년대에 태어나서 70~80년대에 30대를 보낸 대다수의 한국 남성들처럼 우리 아빠도 출퇴근 시간이 따로 없을 정도로 삶에 일 뿐이었다. 아빠가 집에 오는 시간은 밤 11시쯤 이었다. 잠들어 있다가 눈을 비비면서 겨우 일어나 아빠를 안고는 다시 잠들곤 했다. 주말에도 별로 다르지 않았다. 일요일에도 사무실에 출근해서는 저녁 시간이 되면 집에 오곤 했다. 아빠가 집에 있을 때는 나와 동생에게 많은 사랑을 주신 걸로 기억했지만 아빠의 삶의 우선순위는 누가 보아도 일, 일과 관련된 인간관계였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그렇게 큰 불만은 없었다. 아빠가 우리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은 다 했다고 느껴졌다. 그 무렵에 일과 직업에 대한 개념이 나에게 처음 자리잡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바로 내 삶을 다 바쳐서 이루어내는 것 이었다. 학창 시절에는 학업에 내 삶을 다 바쳤다. (그렇다고 공부를 무척 잘 한 것도 아니었으니 그 시절에 미리 깨달았으면 좋았을 것을 그러질 못했다 -_-;;;) 가까운 친구들도 있었고 같이 울고 웃으며 우정을 키워나가는 또래들이 있었지만 분명 우선순위는 아니었다. 사회에서 시작하게 됐을 때도 어린 시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자리 잡은 직업관이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무엇보다 일이 우선이었다. 딱히 정해진 퇴근시간 없이 일을 엄청나게 했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과는 소통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삶에는 일이나 돈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고 해도 고개를 끄덕이기는 해도 지금은 일을 우선 해야 하고 그 외의 것은 나중에 돌보면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항상 하고 있었다. 가족들과 식사 한번 하는게 그렇게 어렵고 친구들과 식사 한번 하려고 해도 학원 빠지는걸 참 아쉬워했다. 참 신기하게도 내 머리 속에 있는 나라는 사람은 친구들, 동료들에게 내 시간이나 정성을 많이 쓰는 사람인데 주변에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다 보니 그냥 하염없이 나이가 들면 진정한 인간관계를 맺기 어렵다고 나이탓만 하게 되었다. 혼자서는 보기 힘든 삶의 사각지대
명상을 하면서 자신을 돌아보면서 무척 놀라웠던 점은 내가 전혀 인지하지 못하던 부분을 볼 수 있게 된다는 점이다. 마치 자동차 미러로는 볼 수 없는 사각지대가 있는 것처럼 명상을 통해서 객관적으로 보지 않고서는 절대 발견할 수 없는 부분이 내 삶에 분명히 있었다.
명상으로 발견한 사각지대는 내가 굉장히 불합리한 일을 반복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삶에서 일이 너무 중요하다 보니 업무량이 정말 많았다. 쉬는 시간, 여가 시간 등이 전혀 없었다. 그러다 보니 번아웃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업무량을 조정해서 적당히 일을 할 수 있는 조건에서도 나는 무조건적으로 내 기준을 쫓아서 엄청난 업무량을 소화했고 그 뒤에는 항상 지치고 힘들고 번아웃으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시간을 겪어야 했다. 그리고 회복이 되면 좀 바꿔야 되는데 바꿀 수 있는 힘이 없었다. 조금은 변하지만 여전히 큰 틀은 무리하고 번아웃되고 무리하고 번아웃되는 되풀이였다. 일에 눈이 가려져서 가족들과 친구들도 보이지 않았다. 내 삶에 그들의 존재가치를 실제보다 너무 낮게 자리매김했었다. 내가 그들을 일과 관련된 사람들 반만큼도 소중히 대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머리로는 그들이 소중하다는 것을 알았지만 실제로는 내 일이 최우선순위였기 때문에 일, 일 관련된 인간관계 등등 다음에나 내가 나눌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고 그게 얼마나 상처가 됐을지 느낄 수 있었다. 내 일을 열심히 한다는 것이 곧 나 자신을 위하는 것이고 그것이 얼마나 이기적일 수 있는 것인지 보이게 되었다. 그 전에는 내가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시간을 꽤 많이 내는 줄 알고 있었는데 실은 아주 기본적인 것을 하면서 내가 그 시간에 일을 해야 하는데 이렇게 당신에게 시간을 쓰고 있다 라는 생각을 하다 보니 내 자신을 주변에 시간과 정성을 많이 쏟는 사람으로 스스로 오해를 하고 있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었다. 명상을 하면서 어린 시절 갖게 된 직업관부터 하나씩 빼기를 했다. 그 시절에 대부분의 아빠들은 엄청나게 일을 많이 했다. 어린 시절에 아빠를 보면서 갖게 되는 직업에 대한 개념이 모두 동일하지는 않을텐데 나는 무의식 중으로 일과 직업에 대한 개념이 아빠의 것과 비슷하게 형성이 되었던 거다. 그런 것들을 빼기 방법으로 하나씩 버리다 보니 내가 무의식적으로 갖고 있는 기준이 내 삶에 큰 영향을 끼치는 걸 알게됐다. 나도 물론 여가생활도 즐기고 싶고 혼자서 업무량을 엄청나게 소화하는 에너지를 팀워크에 더 쏟아붓고 있었다. 그런데 마음 속 깊이 나만의 기준이 나도 모르게 크게 자리를 잡고 있으니 그 기준이 항상 내 결정을 좌지우지했었다. 또한 자신의 기준을 고수하는 것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이고 사람을 경직되게 하는 것인지를 빼기를 하고 나니까 알게 되었다. 근본적인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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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겉핥기식 글쓰기보다 실체와 본질을 잘 담고 싶다. 나의 일상, 직장, 가족, 마음수련… 나는 진실을 잘 담고 있을까? 아니면 글에서조차 나의 실체를 감추고 있는 걸까? 가장 드러내보일 수 있는 공간이라고 믿고 펜이 가는 대로… 나의 밝음과 어둠을 모두 적고 싶다. Archives
June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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