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자책하지마 마. 크게 잘 못 한 것도 아니잖아.” 살면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이다. 작은 실수에도 연연해 하고 죄책감 때문에 몸 둘 바를 몰라 하는 나를 안타까워서 하는 말들이었다. 나도 죄책감을 느끼고 자책을 하는 것을 멈추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원할 때 스탑 버튼을 눌러서 멈출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쉽지 않았다. 그리고 어떨 때는 자책감을 느끼는 편이 오히려 편하기도 했다. 그 외에는 무슨 감정을 느껴야 하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죄책감을 느낄 때면 불안함, 초초함, 열등감도 덩달아 찾아왔다. 사람들과 함께일 때는 주눅 들고 힘들었다. 내가 뭘 잘 못 한 건 없는데도 잘 못 했다는 기분이 자주 들었다. 나를 돌아보다 가족의 권유로 명상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엄마는 내가 자신감이 점점 없어지고 가진 장점을 다 발휘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 안타깝다고 하며 명상을 하면 내가 가진 잠재력이 활짝 피어날 거라고 했다. 명상은 처음 해 보는 거지만 가족은 나를 가장 오래 알아온 사람이니 믿고 한 번 시도해 보기로 했다. 마음수련이라는 명상이었다. 자기를 돌아보고 마음빼기 방법으로 명상을 하는 거라고 강사님에게 안내를 받고 명상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내 상태가 좋아지려는 마음으로, 일종의 자기 계발이라고 생각하고 시작했다. 그러나 시간이 조금씩 지나면서 명상은 단순한 자기 계발 정도가 아니라는 걸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었다. 내 삶을 처음부터 끝까지 리셋하고 완전히 변화시킬 거라고 짐작이 되었다. 명상시간에 내 삶을 되돌아 볼 때면 마치 평생 일반 자동차만 몰다가 후면 카메라가 달린 자동차를 운전하는 기분이었다. 백미러, 사이드미러로 보면 당연히 생기는 사각지대를 한눈에 다 보게 된 기분이었다. 내 기준과 관점으로 세상을 보며 살 때에 보이지 않고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는데, 명상을 하면 할수록 타인이나 전체적인 입장에 대해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단순히 머리로 이해하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느껴졌고,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응어리 졌던 부분이 많이 풀리게 되었다. 나의 첫 죄책감 명상을 하면서 죄책감도 되돌아 보게 되었다. 나의 첫 죄책감은 어릴 적 동네에서 마주친 할머니 분과 연관되어 있다. 골목에서 동네 친구들이랑 장난을 치고 있는데 너무 시끄럽다고 야단을 치셨던 기억이 떠올랐다. 모르는 사람에게 그렇게 혼나본 적은 처음이라 나는 어쩔 줄을 몰라 했고 할머니 분이 “잘못했어, 안했어?” 라고 계속 물어보는데 무섭고 놀라서 울면서 잘못했다고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했었다. 그 때 무서움과 놀람과 함께 내가 잘 못 했다는 기분이 들었다. 잘 못 한다는 건 나에게 두려움을 안겨줄 수 있다는 것을 그 때 처음 경험했다. 그 이후로 “시끄러움”은 나에게 죄책감을 느끼게 하는 버튼이 되었다. 학교에서도 다른 아이들이 떠들면 내 마음이 두근거리고 ‘떠드는 건 잘 못 하는 건데…’라는 생각이 무의식적으로 들었다. 내가 떠들건 안 떠들건 상관없이 시끄러움이 있으면 죄책감과 두려움을 느꼈다. 초등학교 다니는 내내 그런 죄책감에 시달렸던 것 같다. 그리고 잘잘못에 대해 지나치게 예민해졌다. 그 기억은 내 안에 오랫동안 있었고 그 기억이 떠오를 때면 그 할머니를 원망하기도 했다. 애한테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나 싶었다. 그런데 명상을 하면서 되돌아 볼 때는 좀 달랐다. 남이 아닌 나를 기억하고 되돌아 보게 되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집순이였다. 집에 있는 걸 좋아해서 좀처럼 밖에 나가는 일이 없었다. 어쩌다 한 번 친구들이랑 밖에서 놀 때는 운동신경도 별로 없었고 잘 부딪히고 주변에 있는 물건들을 떨어뜨리곤 했다. 그 때도 친구들이랑 골목에서 놀 때에 내가 대문같은 데에 부딪히고는 대문 안쪽에서 그릇 같은 게 깨지는 소리가 났다. 아마 문 안쪽에 깨지는 그릇 같은게 있었던 거 같은데 내가 부딪혀서 깨뜨렸던 거라고 추측이 된다. 바로 할머니가 그 집에서 뛰어 나와서는 화가 잔뜩 나서 소리를 지르고 잘못했냐고 묻기 시작했다. 그 당시에는 집순이가 오랜만에 바같 세상에 나와서는 상황 판단이 바로 되질 않았다. 갑자기 놀란 일을 겪고 재산적인 피해도 입은 건 내가 아니라 그 할머니 쪽이 아니었을까? 그러고 보니 할머니가 이해가 됐다. 집 밖 골목에서 애들이 장난 치다가 집안 물건이 깨졌으니 화가 날만도 했다. 그리고 친구들도 무서웠을텐데 할머니한테 내가 그랬다고 고자질도 하지 않고 그냥 같이 혼나주었다. 할머니에게 미안하고 친구들에게 고마웠다. 할머니가 놀라서 소리치시는 바람에 그 때 정확한 상황을 판단하지도 못했고 제대로 기억하지도 못했다. 그 순간의 진짜 현실은 내 두려움에 덮여 버린 거였다. 그리고는 난 평생 동안 죄책감과 씨름했고 그 할머니에 대한 원망만 안고 살아가게 된 거다. 그동안 보지 못했던 사각지대… 그런데 정확하게는 모르겠다. 명상시간에 되돌아보면서 다시 떠오르게 된 그 기억이 정말 맞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할머니도 친구들도 지금 없으니까 물어볼 사람도 없다. 그걸 기억이나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동안은 어렴풋이 기억나던 게 명상하면서 되돌아 볼 때는 정말 몇 시간 전에 일어난 일처럼 선명하게 기억이 날 때가 있어서 정말 신기했다. 마치 사각지대를 차의 실내카메라로 똑똑히 보는 것 같아서 신기했다. 그래서 명상을 더 찾게 된 이유도 있었다. 하지만 신기한 게 다는 아니었다. 마음수련의 실체는 마음을 비우는 데에 있다. 명상시간에 되돌아보고 마음을 비우고 되돌아보고 마음을 비우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더 신기하게도 내가 갖고 있던 부정적인 마음들이 점점 옅어지고 없어지기 시작했다. 죄책감 없이 사는 삶 명상 전의 나는 자책과 주눅이 키워드였다. 사람들은 별 일이 아니라고 하는데 나는 가슴이 두근두근 뛰고 자책감과 죄책감에 사로잡혀서 어쩔 줄을 몰라할 때가 많았다. 어릴 적 잘못된 기억 속의 그 아이처럼 말이다. 심지어는 기아아동이나 유기견들을 보면서 죄책감을 느끼기도 했다. 죄책감을 느끼는 횟수가 너무 많다 보니 나는 대체적으로 주눅이 들어있었다. 실수에 대한 두려움도 참 컸다. 명상 후부터는 정말 많이 달라졌다. 어느 기간 동안 죄책감을 많이 되돌아 보게 되어서 많이 비운 후 즈음이었다. 내가 실수를 해서 회사 일정과 예산을 조정해야 하는 일이 있었다. 담당자 분과 이 부분에 대해서 대화를 하는데 그 때가 바로 난생 처음으로 잘 못 하고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던 순간이었던 거 같다. 그쯤 되면 내 마음 속은 이미 죄책감 진흙탕으로 더러워져있고 회사도 그만둔다고 하고 눈물도 보일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진심으로 사과하고 상황과 상황의 원인을 담담히 이야기할 수 있었다. 운이 좋게도 담당자 분도 충분히 이해를 해주셨고 앞으로 또 일어날 수 있는 상황에 어떤 대책이 필요한지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그렇게 2시간 정도 이야기 한 후에 돌아서는데, 순간 ‘잠깐,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싶었다. 평소의 나라면 죄책감 때문에 말도 제대로 못하고 ‘네네’ 하고 듣기만 하거나 서로 굉장히 힘든 대화를 겨우겨우 했어야 했는데... 그 때 나는 깊은 죄책감이나 자책을 하지 않았고 그냥 있는 상황에 대해서 담담히 파악을 하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 지에 내 진짜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생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죄책감은 누구나 느끼는 감정이다. 하지만 그 감정에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은 그것을 경험하는 개인에게 큰 문제이다. 명상을 해서 그 문제에서 벗어난 점이 나에게는 일생일대의 가장 기쁜 일이다.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으니까. 똑 같은 상황이 생기더라도 반복적으로 죄책감을 느끼고 헤어나오지 못하는 대신, 어떻게 하면 상대방에게 내 미안한 마음을 전달할 수 있을지, 그리고 잘못된 원인이 무엇이고 이 사건을 통해 배우는 것은 무엇인지에 관심이 먼저 간다. 감정 소모를 하지 않으니 해결책을 찾는 것도 수월해졌다. 나에게는 문제해결 능력이 없는지 알았는데 단지 감정에 빠져서 허우적대느라 문제 해결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던 거였다. 그리고 권유해준 가족의 말대로 조금씩 조금씩 부정적인 마음에 가려져 있던 능력들이 드러나고 개발이 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직접적으로 잘 못 하지 않은 일에 죄책감을 느끼는 것도 그런 시기가 있었구나 하고 그냥 받아들이게 되었다. 나라는 사람은 살아온 삶, 주변인들, 환경, 시대적 배경, 유전적 배경 등의 총합인데 나의 행동이나 감정에 대해서 또 잘잘못을 따지는 것에 시간을 아끼기로 했다. 있는 그대로를 그냥 받아들이고 나니 나는 훨씬 자유로워졌다. 마음을 비운 자리에 찾아온 행복 마음수련 명상을 통해서 삶이 180도 변하고 정말 행복해졌다. 감정을 느끼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 감정에 사로잡혀서 헤어나오지 못 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명상, 마음수련의 실체는 문제에서 빠져나와 행복하고 자유로운 삶을 살게 해 주는 데에 있다. 그동안 느끼지 못 했던 여유, 사람들과 함께 하는 즐거움, 자기자신을 스스로 이기고 성장하는 삶. 마음을 비우는 것만으로 이 모든 걸 느끼고 살아가게 되어서 오늘도 참 고맙고 행복하다.... 끝으로 마음수련 명상을 시작하고 싶은 분들이 있다면 마음수련 참가 안내를 참고하기 바란다. #죄책감 #자책 #주눅 #자신감 #명상 #마음수련 #마음빼기방법 #명상
우리 모두들 어릴 적 경험했던 일들이 일생에 걸쳐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어렸을 때의 경험 하나가 특정한 직업, 사고방식, 취향을 가진 사람으로 성장하는 데에 기여하기도 한다. 그 경험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원래 있었던 일과는 완전히 다른 경험치가 되는 것도 사실이다. 경험이 부정적이냐 긍정적이냐보다는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한 맥락이다. 소소한 경험이 내가 한 해석 때문에 거절감이 되어서 오랜 기간 내 삶에 영향을 끼친 적이 있다. 어릴 적의 나는 아빠의 드로잉 육아를 참 좋아라 했다. 아빠가 종종 그림을 그려줬는데 그걸 참 좋아해서 붙인 이름이다. 그 당시 대한민국의 가장들이 그렇듯이 아빠도 하루 종일 사회생활 하다가 밤에만 잠깐 집에 있었기 때문에 (거기다 주말에는 거의 잠을 잤기 때문에) 아빠의 육아시간은 희소성의 가치가 높은 이유로 많이 좋아했던 거 같기도 하다. 아빠는 미대 진학을 고민할 정도로 그림을 좋아했고 나와 내 동생이 태어난 이후에도 연필 스케치를 자주 했었다. 나 역시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었고 6살 유딩이에게는 어른의 성숙한 선과 느낌으로 그린 그림을 직접 보는 게 너무나도 신기했다. 희소성 가치 대박인 이 분이 내가 좋아하는 그림그리기를 눈앞에서 시연하시는데… 게다가 아직 자아도 형성 덜 된 나를 그려 주셔서 내가 어떤 사람으로 보이는지 알려 주시니… 아빠의 이런 육아는 나에게 있어 최애꿀타임이었다. 어느날, 아빠가 종이랑 연필을 들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너무너무 기대하는 마음으로 기다리다가 아빠가 다 그렸다고 하면서 보여주는 그림을 보았다. 나와 동생을 그린 그림이었는데 우리 자매와 생김새나 느낌이 닮아서 탄성을 지르게 되었다. “아빠 정말 똑같아. 진짜 잘 그렸어!” 아빠는 “이거 뭐가 잘 그려”라고 반응을 했다. 아빠의 반응이 당시 나에게는 큰 충격으로 느껴졌다. 6살의 나는 1. ‘이게 안 똑같다구? 말이 돼? 얼굴에 눈이며 볼이며 입술이며 완전 똑같은데?’ 2. ‘아니 칭찬해 주는데 왜 화를 내지? 유치원 선생님이 칭찬 받으면 고맙습니다 라고 하라고 했는데 이 낯선 반응은 대체 뭐지?’ 라는 두가지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어려서 그 마음이 무엇이었는지 모르겠는데 마음이 마치 종이에 손가락을 베일 때처럼 아리듯이 아팠다. 그 이후로 점점, 내가 무엇인가를 무척 좋아해서 이야기를 할 때에 사람들이 긍정하지 않을 때에 유달리 예민하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대화를 이어가다 보면 사람들이 쑥스러움을 느끼거나 별거 아닌걸 치켜 세운다고 생각해서 등등의 이유였다. 내가 정말 좋아서 무엇인가를 제안했을 때에도 사람들이 시큰둥하거나 반박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관심이 없어서, 토론식의 대화에 익숙해서, 더 나은 대안이 있어서, 잘 몰라서, 그 제안의 내용을 예전부터 정말 싫어해서 등등의 이유에서였다. 대화를 이어나가기도 하는데 주로 내면에서 내가 얻는 경험치는 6살때의 나와 비슷했다. 더 이상 대화를 이어 나가질 못하고 1. 내 생각에는 정말 그런데 2. 좋은 말 하는데 왜 반박을 하지? 라는 두가지 생각이 들면서 마음이 아팠다. 서로 다른 취향과 의견을 갖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데 머리로는 당연히 수용이 되는데 마음으로는 뭔가 언잖았다. 0.0005초 정도 짧은 순간, 미묘하게 느껴지는 거부 당하고 거절되는 느낌. 내가 거절되는 느낌이었다. 머리로는 그냥 취향이 다른거지 내 취향이 상대 취향이 아니라는 게 내 취향이나 나를 거부하는 게 당연히 아니라는 것을 머리로는 알았지만 마음으로는 거절감을 꼭 한번씩 느끼곤 했다. 그때처럼 아리듯이. 그리고는 나이가 들면서 그 아픈 마음이 “거절감”이라는 이름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 아린 마음이 어느 정도 되면 괜찮은데 컨디션이 안 좋거나 기분이 이미 안 좋은 상태일 때는 마음이 아픈 정도가 너무 컸다. 정말 별 거 아닌 주제로 상대방에게서 아니라는 말을 들으면 그게 마음의 상처가 되었다. 정말 사소한 것들 예를 들어 메뉴 고를 때나 좋아하는 노래나 가수 얘기할 때도 사회 이슈에 대해 이야기 할 때도 거절감을 일일이 느끼곤 했다. 나는 정말 좋다,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라고 하는데 상대가 별로라고 하면 그게 거절받았다는 마음으로 느껴졌다. 이성적으로는 거절이 아니고 그냥 의견이 다를 뿐이고 다양성을 서로 존중하는 사회가 되기를 바라면서 나 자신은 서로의 다름에 대해 공유하는 게 불편할 때가 많고 사소한 것에 거절감과 갈등을 느끼게 되니까 나도 나를 모르겠고 사는게 참 피곤했다. 그러다 거절감에 대해서 굉장히 자유롭게 된 터닝포인트가 생겼다. 마음수련 명상이었다. 명상은 자기를 돌아보는 것이다. 명상을 하면서 자기를 돌아보게 되면 좀 더 객관적인 시각으로 자신을 볼 수 있게 되는 점이 참 좋았다. 어린 시절부터 있었던 일을 돌아보는데 위에서도 말한 아빠랑 있었던 일이 꽤 큰 일이었는지 돌아볼 때마다 자주 떠오르곤 했다. 명상을 하기 전에는 그 기억은 당시 겪으면서 기분이 안 좋았고 커서 생각해 봐도 기분이 안 좋다 보니 아빠가 어린 애한테 왜 그랬을까 하면서 원망하는 느낌이 컸다. 굳이 생각을 하자면 아빠 입장도 이해가 되지만 직관적으로 다가오는 느낌은 부정적이었다. 그리고 명상을 계속 하다 보니 그 때 그 기억이 내 첫번째 거절감이었던 것도 차츰 알게 되었다. 그리고 더 돌아보고 빼기 방법으로 마음을 빼기 하면서 부정적인 마음이 덜어지면서 차츰 더 객관적으로 당시 상황이 판단되기 시작됐다. 당시 6살의 나는 기대감이 컸다. 워낙 아빠 그림 함께 보는 시간을 좋아했고 그만큼 내 좋아하는 마음을 가득 담아 아빠에게 전달하면 아빠도 그만큼 좋아하겠지, 행복해 하겠지 라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기대감과 정반대의 반응을 겪으니까 공기 다 찬 풍선이 빵 터지듯이 내 기대감도 그렇게 터져버렸던 거 같다. 그 터진 기대감이 인생의 쓴 맛이었던 거다. 누구나 맛 보아야 하는 인생의 쓴맛. 어릴 때에 쓴맛을 알게 모르게 다 겪는데 나는 거절감이라는 쓴맛을 비교적 어릴 때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명상을 하면서 그 당시 경험은 내가 기대감에 부풀어 있어서 거절감을 느끼게 된 거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시점이 나에게는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 명상을 하면 생각이 바뀌는구나, 손가락을 남한테 향하지 않고 나에게 향하니까 마음이 오히려 편하네. 누군가를 원망하는 건 정말 기운 빠지는 일이네… 라고 생각이 바뀌게 되었다. 명상 방법대로 자신을 돌아보니까 관점이 실질적으로 바뀌는 게 참 대단했다. 그리고 내가 하던 명상의 마음빼기 방법으로 거절감의 뿌리인 기대감을 빼기하면서 더 대단한 것을 발견했다. 그건 바로 내 사고방식, 행동, 말이 자연스럽게 바뀐다는 거였다. 예전에는 당연히 내가 거절감 느낄 일인데 명상을 한 이후에는 거절감을 느끼는 정도와 횟수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예전에는 거절감을 느끼지 않으려고 애를 많이 썼는데 기대감이 없어지니까 거절감을 느끼는 일이 거의 없어졌다. 예를 들어, 예전에는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에 상대방이 내가 좋아하는 것이 별로라고 하면 이 사람이 나를 싫다고 하는 것처럼 느껴지고 내 존재가 우리 관계에서 존중받지 못 하는 것 같고 내가 거절을 당하는 느낌이었다. 머리로는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거절감이 훅 하고 들어올 때면 나는 속수무책이었다. 그리고 그 거절감이 상처가 되어서 오랫동안 마음을 앓기도 했다. 그런데 명상 이후에는 내가 좋아하거나 제안, 추천하는 것을 상대가 탐탁치 않게 생각하면 우선 반응이 “아 정말? 왜 그런데?” 라고 궁금해 지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훅 하고 들어오는 거절감 때문에 정신을 못 차려서 대화를 이어나가지 못 하는 경우가 많았던 거에 비하면 너무나 큰 발전이었다. 그리고 상대가 좀 공격적이거나 호불호의 선을 확실하게 그으면서 이야기를 해도 기분이 상하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 라는 생각이 들고 그걸 내가 말로 하지 않아도 상대가 먼저 느끼는 경우가 많았다. 누군가 먼저 이해심으로 다가가면 상대방도 이해심으로 반응하는 경험을 자주 하게 된다. 기대감도 알고리즘이 있는 것 같다. 관계 또는 대화를 하면서 기대를 갖게 되면 상대의 반응을 짐작하게 되고 그 짐작대로 되면 굉장히 들뜨고 짐작대로 되지 않으면 필요 이상으로 큰 실망감 또는 거절감이 느껴진다. 그것은 상처가 되어서 회복하는데에 어느 정도 시간이 소요되는데 다 회복되기 전에 비슷한 상황에 놓이면 (100% 놓인다. 집에서 혼자서만 있어도 TV보거나 책보면서 또는 예전 생각날 때 그 생각에 빠지게 되면 비슷한 경험치를 또 쌓게 되는 경우가 거의 다시 생기더라…) 또 상처가 되어서 회복하고 성장하는 데에 걸림돌이 된다. 그리고 기대감을 갖고 있으면 상대는 부담을 느껴서 당연히 반작용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 기대감을 덜어내고 상대를 대하니까 상대 역시 굳이 반작용을 할 필요가 없어지게 된 듯 하다. 상대방이 나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면 1. 상대가 사이코패스 또는 사이코패스와 동급 2. 상대가 나한테 스트레스 해소중 3. 내가 주는 영향에 반응하는 중 … 이렇게 3가지 중 하나일 거라고 생각한다. 1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게 없다. 2도 거의 마찬가지이다. 3은 내가 어떻게 컨트롤할 수 있는 부분이니까 현실가능한 3에 집중해 본다. 내가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전혀 생각지도 못한 포인트에서 원인제공을 하고 있는 경우가 있는데 그걸 알려면 객관적인 시각에서 나를 바라보면 전혀 생각지도 못한 포인트가 무엇인지가 신기하게도 보인다. 운전할 때 있던 사각지대가 후방 카메라 설치 후 훤히 잘 보이듯이 말이다. 혼자서 자기 회고식으로 돌아보는 것과는 전혀 다르게 명상은 객관적인 관점으로 자신을 돌아보게 해준다. 그리고 빼기를 통해서 그 갈등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해준다. 여기에 내가 했던 마음수련의 실체가 있다. 그래서 지금은 기대감 없이 상대에게 말을 건네고 대화를 하다 보니 거절감을 느끼는 경우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최근에 느꼈던 거절감, 마상이 기억이 가물가물한 거 보니 거의 없는 듯 하다. 그리고 거절감이 없으니까 대화를 하는 기회가 늘어나고 내가 대화를 어떻게 해야 효과적으로 할 수 있을지를 더 공부하게 되고 어른이 되어가는 듯 하다. 흔히 말하는 내면아이가 드디어 철이 나서 어른이 되어가는 것 같다. 어릴 적에 아빠가 나에게 잘 해주겠지 라는 기대감이 꺾이고서는 내가 표현하는 호불호나 제안에 대한 상대방의 반응에 필요 이상으로 거절감을 느끼던 것이 없어지고… 그 자리에는 원래 자연이 그런 것처럼 씨가 뿌려지고 새싹이 나고 성장을 하고 열매를 맺는 것처럼 씨를 가리던 잡초를 빼고 나니까 새싹이 나고 성장을 하고 열매를 맺는 정상 궤도에 들어서게 되었다. 그게 마음수련의 실체인 듯 하다. 원래의 정상궤도에 나를 되돌려 놓는 것. 명상이 없는 삶은 생각할 수도 없을 정도로 큰 도움을 받고 있어서 요즘에도 명상을 계속 하고 있다. 명상은 사각지대에 있어서 발견하지 못했던 부분을 후방카메라가 보여주듯이 훤하게 보여주곤 한다. 그걸 빼고 나면 일탈해 있었던 삶의 한 부분이 정상궤도로 다시 돌아오는 경험을 한다.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성장을 하고 결과물이 만들어지고 주변에 베풀 수 있는 기회도 생긴다. 이렇게 정상궤도에서 살아지는 삶이 행복에 가까운 삶으로 느껴진다. 편집하려면 여기를 클릭하세요.인간관계에 대해 만족스럽지 않을 때에 ‘나는 왜 이렇게 매번 휘둘릴까?’ 또는 ‘그 사람은 그렇게 가깝지도 않은데 사적인 질문을 너무 자주 해. 내가 어떻게 해야하지?’ 라는 고민을 하게 된다. 거리가 적당하지 않을 때에 생기는 고민들이다.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서로에게 편안하고 안전하고 외로움을 느끼지 않을 일정한 거리가 존재한다. 가족 사이에도 너무 지나친 간섭은 그 선을 넘어 간섭을 당하는 입장에서는 당연히 불편하고 존중받지 않는 느낌을 받으며, 간섭을 하는 입장 역시 관계가 뜻대로 되지 않아 불만족이나 좌절감, 외로움을 느끼게 된다. 공적인 일로 만나는 사이에서 객관적이고 산뜻한 관계를 이어갈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일정한 거리를 파악하고 유지하는 것이다. 그러면 거리두기, 과연 어떻게 하면 좋을까? 자신과의 거리두기 먼저 시작해 봤어요! 인간관계에서의 거리 두기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해결책을 찾으려고 노력을 많이 했는데 답을 찾은 곳은 내 자신이었다. 명상을 빼고 이야기할 수 없겠다. 명상을 하면서 단계별로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돌아보게 되었고, 객관적으로 자신을 돌아보니 체감적으로 가장 좋았던 점은 느낌이나 생각을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 있게 된 점이다. 명상 이전에는 예를 들어 화가 나면 화, 분노라는 감정에 사로잡혔다. 또는, 슬퍼지면 슬픔 속에 빠지고, 부정적인 생각이 떠오르면 꼬리에 꼬리를 물어 멈출 수가 없었다. 참거나 다른 데에 관심을 돌리기도 했는데 그 때뿐이었다. 마치 내가 연료가 되어서 분노, 슬픔이라는 불을 활활 태우는 기분이었다. 그 불이 꺼질 때쯤이면, 나는 이미 완전히 소진되어서 몸과 마음이 피폐해져 버렸다. 명상 이후에는 내 안에서 떠오르는 감정이나 생각을 거리를 두고서 볼 수 있게 되었다. 화가 나면 “지금 내가 화가 나는구나, 화가 나서 ~~~한 느낌이 드는구나, 그래서 소리도 지르고 싶고 화풀이도 하고 싶구나.” 라는 생각들을 하게 된다. 분노와 나를 동일시하지 않고 한 발자욱 떨어져서 분노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심리전문가들 말에 따르면 명상을 하면 자신의 이익에서 한 발자욱 떨어져서 객관화할 수 있게 된다고 한다. 이렇게 감정과 거리를 두고서 그리고 내 안에 이런 감정이 있다는 것을 담담히 인정을 한다. 그리고 명상을 명상을 해서 그런 감정들을 비워낸다. 업무를 보는 중에도 명상을 할 수 있어서 다행인데, 내가 하는 마음수련에서는 눈을 뜨고서 일상 생활 중에도 명상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한다. 마음수련의 실체는 일상생활을 하면서 평정심을 유지하고 마음의 힘을 키우게 하는 데에 있다. 나 감정과 생각으로부터 건강한 거리를 유지하기 명상을 꾸준히 하면서 감정에서 거리를 두는 법이 자연스러워졌다. 그래서 내가 내 감정에 휘둘려서 원하지 않는 선택을 하는 일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예전에는 주로 칼로리 높은 음식을 먹거나 충동구매를 하곤 했는데 요즘에는 그런 일이 거의 없다. 그리고 감정이 조절 안 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스트레스가 되는데 그 감정 때문에 누군가에게 또는 업무에 실수가 있으면 그것 역시 큰 스트레스이다. 마지막으로 그런 일이 언제 있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할 만큼 감정 때문에 원치 않는 일을 하는 경우가 거의 없어진 셈이다. 또한 혼자 있을 때에도 어떤 부정적인 생각이 떠오르면 예전에는 그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곤 했다. 지금은 명상을 하면서 “나에게 이런 생각이 일어나는구나” 하며 차분히 명상을 하다보면 어느새 부정적인 생각은 사라지고 내가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근본 뿌리도 찾곤 한다. 주로 어릴 때 겪었던 일, 일반적인 고정관념 등이 무의식에 깔려있는 근본 뿌리이다. 명상을 하니까 비슷한 부정적인 생각은 다시 떠오르지 않게 되고, 떠올라도 그런 생각을 바로 비울 수 있는 마음의 힘이 생겨서 행복감이 늘어났다. 그래서… 사람들 사이에서의 거리두기는? 예전에는 사람들 사이에 건강한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인위적인 노력을 많이 했었다. 원래 성격이 즉흥적이라 쉽지가 않았다. 명상을 하면서 서서히 사람들과 건강하고 편안한 거리가 만들어졌다. 나 자신 안에서 떠오르는 감정이나 생각들과 거리를 두는게 자연스러워지면서 사람들과도 그런 거리두기가 자연스러워 졌다. 대화 중에 상대가 자신의 제안을 강하게 할 때가 있다. 어투가 강해서, 설득을 진지하게 해서, 오랜 기간 이야기 해서 등의 이유이다. 예전에는 휘말리는 경우가 참 많았다. 그게 싫어서 아예 상대를 안 할 때도 있었다. 지금은 ‘이 사람이 강하게 밀어붙인다고 내가 느끼는구나’ 라고 내가 느끼는 감정을 솔직하게 인정을 한다. 그리고 ‘이 사람은 이 일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하고 표현하는구나’ 라고 또 인정이 되는데, 일부러 인정하려고 노력한다기보다는 지금 눈 앞에 일어나는 일을 있는 그대로 인정할 수 있는 마음의 힘이 명상으로 생긴 듯 하다. 마치, 휘트니스에서 꾸준히 운동을 하니 근육이 생겨서 자연스럽게 그 근육을 쓸 수 있게 되는 것과 비슷하다. 인정과 명상으로 대화가 어느 한 상대방에 치우치지 않고 균형 있게 흘러간다. 상대를 그냥 있는 그대로 마음으로 인정하는 것 만으로 내가 대화에서 질질 끌려다니는 일이 거의 없어졌다. 그리고 신기한 점은 상대가 원하는 대로 해도 상대방의 반응이 예전같지 않다는 점이다. 강한 쪽에 이끌려서 내린 결정이 아니라 내가 선택해서 내린 결정에 대해서는 상대방의 존중이 따라오게 되는 걸 경험한다. 내 마음에도 휘둘렸다는 마음이 남지 않아서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는 점도 있다. 반대로 내가 누군가를 휘두르게 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나에게는 중요한 일이라 애를 쓰면서 상대를 납득시키려고 하는 경우에는, ‘나는 이 부분에 대해서 이렇게 애를 쓰는구나’라고 인지하고 인정을 하게 된다. 그리고 눈 앞의 상대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상대가 전하는 말을 듣는다. 그렇게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자세가 명상으로 생긴 이후로는 무리하게 일을 진행해서 서로 나쁜 기억만 생기는 일이 줄어들었다. 이후에 상대에게서 다시 생각해 보았다며 긍정적인 답변을 듣는 경우도 종종 있다. 나와 성향이 맞지 않는 사람과 거리두기
그리고 예전에는 너무 많은 사적인 질문을 하는 사람과 시간을 보내고 나면 항상 불편했다. 지금은, ‘이런 상황을 내가 정말 싫어하는구나’ 하고 인정을 한다. 그리고 상대가 보이는 관심에 대해서도 인정을 한다. 모든 사람들과 잘 지내려는 욕심을 내려놓고 내가 크게 화나지 않고 말실수 안 했다는 것만으로도 나와 성향이 굉장히 다른 사람과의 대화가 꽤 성공적인 것이다. 나 같은 경우 이렇게 받아들이는 것이 에너지 소모도 적고 정신건강에도 상당히 좋게 작용한다. 장기적으로도 인간관계의 부담을 훨씬 줄일 수 있다. 그 외에도 타 부서 직원이나 아파트 이웃과 어쩌다 한 번 단 둘이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칠 때에 어색한 경험도 얼마나 많은가. 간단한 목례 후에 흐르는 30초의 적막 (이라 적고 궁극의 어색함이라 읽는다). 이 또한 그 상대와의 거리두기가 어려운 이유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럴 경우, 그냥 내가 어색함을 느낀하고 인정하고 명상을 하면 오히려 상대가 말을 거는 경우도 자주 있다. 또는 아무 말 없지만 어색함을 느끼지 않고 산뜻하게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게 되는데 다음에 마주칠 때에 어색함이 훨씬 줄어들고 서로 편안해진 걸 서로간에 느낄 수 있다. 서로의 공간을 존중할 때에 생기는 긍정적인 거리감 결국에 거리란 것은 편안하게 관계를 유지하기에 필요한 각자만의 공간이 존중되면서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것이다. 그 공간을 존중하는 것은 의뢰로 단순하다. 상대의 존재를 인정 하면 상대는 존중받는 느낌을 충분히 받으며 자신의 공간을 스스로 지킬 수 있다. 내가 나를 존중하고 내 공간을 지킬 수 있기에 상대방의 공간을 존중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편안한 인간관계는 나 자신과의 관계가 먼저 편안해져야 만들어진다. 나 자신과의 거리두리를 하게 되면 인간관계에서의 거리두기도 굉장히 자연스럽고 쉽게 접근할 수 있다. 마음수련의 실체는 자신이 먼저 행복해질 수 있는 힘을 키워주고, 관계에서 상대 역시 행복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 있고 이 점에서 모두에게 추천해 주고 싶은 마음이다. |
Author겉핥기식 글쓰기보다 실체와 본질을 잘 담고 싶다. 나의 일상, 직장, 가족, 마음수련… 나는 진실을 잘 담고 있을까? 아니면 글에서조차 나의 실체를 감추고 있는 걸까? 가장 드러내보일 수 있는 공간이라고 믿고 펜이 가는 대로… 나의 밝음과 어둠을 모두 적고 싶다. Archives
June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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