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들 어릴 적 경험했던 일들이 일생에 걸쳐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어렸을 때의 경험 하나가 특정한 직업, 사고방식, 취향을 가진 사람으로 성장하는 데에 기여하기도 한다. 그 경험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원래 있었던 일과는 완전히 다른 경험치가 되는 것도 사실이다. 경험이 부정적이냐 긍정적이냐보다는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한 맥락이다. 소소한 경험이 내가 한 해석 때문에 거절감이 되어서 오랜 기간 내 삶에 영향을 끼친 적이 있다. 어릴 적의 나는 아빠의 드로잉 육아를 참 좋아라 했다. 아빠가 종종 그림을 그려줬는데 그걸 참 좋아해서 붙인 이름이다. 그 당시 대한민국의 가장들이 그렇듯이 아빠도 하루 종일 사회생활 하다가 밤에만 잠깐 집에 있었기 때문에 (거기다 주말에는 거의 잠을 잤기 때문에) 아빠의 육아시간은 희소성의 가치가 높은 이유로 많이 좋아했던 거 같기도 하다. 아빠는 미대 진학을 고민할 정도로 그림을 좋아했고 나와 내 동생이 태어난 이후에도 연필 스케치를 자주 했었다. 나 역시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었고 6살 유딩이에게는 어른의 성숙한 선과 느낌으로 그린 그림을 직접 보는 게 너무나도 신기했다. 희소성 가치 대박인 이 분이 내가 좋아하는 그림그리기를 눈앞에서 시연하시는데… 게다가 아직 자아도 형성 덜 된 나를 그려 주셔서 내가 어떤 사람으로 보이는지 알려 주시니… 아빠의 이런 육아는 나에게 있어 최애꿀타임이었다. 어느날, 아빠가 종이랑 연필을 들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너무너무 기대하는 마음으로 기다리다가 아빠가 다 그렸다고 하면서 보여주는 그림을 보았다. 나와 동생을 그린 그림이었는데 우리 자매와 생김새나 느낌이 닮아서 탄성을 지르게 되었다. “아빠 정말 똑같아. 진짜 잘 그렸어!” 아빠는 “이거 뭐가 잘 그려”라고 반응을 했다. 아빠의 반응이 당시 나에게는 큰 충격으로 느껴졌다. 6살의 나는 1. ‘이게 안 똑같다구? 말이 돼? 얼굴에 눈이며 볼이며 입술이며 완전 똑같은데?’ 2. ‘아니 칭찬해 주는데 왜 화를 내지? 유치원 선생님이 칭찬 받으면 고맙습니다 라고 하라고 했는데 이 낯선 반응은 대체 뭐지?’ 라는 두가지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어려서 그 마음이 무엇이었는지 모르겠는데 마음이 마치 종이에 손가락을 베일 때처럼 아리듯이 아팠다. 그 이후로 점점, 내가 무엇인가를 무척 좋아해서 이야기를 할 때에 사람들이 긍정하지 않을 때에 유달리 예민하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대화를 이어가다 보면 사람들이 쑥스러움을 느끼거나 별거 아닌걸 치켜 세운다고 생각해서 등등의 이유였다. 내가 정말 좋아서 무엇인가를 제안했을 때에도 사람들이 시큰둥하거나 반박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관심이 없어서, 토론식의 대화에 익숙해서, 더 나은 대안이 있어서, 잘 몰라서, 그 제안의 내용을 예전부터 정말 싫어해서 등등의 이유에서였다. 대화를 이어나가기도 하는데 주로 내면에서 내가 얻는 경험치는 6살때의 나와 비슷했다. 더 이상 대화를 이어 나가질 못하고 1. 내 생각에는 정말 그런데 2. 좋은 말 하는데 왜 반박을 하지? 라는 두가지 생각이 들면서 마음이 아팠다. 서로 다른 취향과 의견을 갖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데 머리로는 당연히 수용이 되는데 마음으로는 뭔가 언잖았다. 0.0005초 정도 짧은 순간, 미묘하게 느껴지는 거부 당하고 거절되는 느낌. 내가 거절되는 느낌이었다. 머리로는 그냥 취향이 다른거지 내 취향이 상대 취향이 아니라는 게 내 취향이나 나를 거부하는 게 당연히 아니라는 것을 머리로는 알았지만 마음으로는 거절감을 꼭 한번씩 느끼곤 했다. 그때처럼 아리듯이. 그리고는 나이가 들면서 그 아픈 마음이 “거절감”이라는 이름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 아린 마음이 어느 정도 되면 괜찮은데 컨디션이 안 좋거나 기분이 이미 안 좋은 상태일 때는 마음이 아픈 정도가 너무 컸다. 정말 별 거 아닌 주제로 상대방에게서 아니라는 말을 들으면 그게 마음의 상처가 되었다. 정말 사소한 것들 예를 들어 메뉴 고를 때나 좋아하는 노래나 가수 얘기할 때도 사회 이슈에 대해 이야기 할 때도 거절감을 일일이 느끼곤 했다. 나는 정말 좋다,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라고 하는데 상대가 별로라고 하면 그게 거절받았다는 마음으로 느껴졌다. 이성적으로는 거절이 아니고 그냥 의견이 다를 뿐이고 다양성을 서로 존중하는 사회가 되기를 바라면서 나 자신은 서로의 다름에 대해 공유하는 게 불편할 때가 많고 사소한 것에 거절감과 갈등을 느끼게 되니까 나도 나를 모르겠고 사는게 참 피곤했다. 그러다 거절감에 대해서 굉장히 자유롭게 된 터닝포인트가 생겼다. 마음수련 명상이었다. 명상은 자기를 돌아보는 것이다. 명상을 하면서 자기를 돌아보게 되면 좀 더 객관적인 시각으로 자신을 볼 수 있게 되는 점이 참 좋았다. 어린 시절부터 있었던 일을 돌아보는데 위에서도 말한 아빠랑 있었던 일이 꽤 큰 일이었는지 돌아볼 때마다 자주 떠오르곤 했다. 명상을 하기 전에는 그 기억은 당시 겪으면서 기분이 안 좋았고 커서 생각해 봐도 기분이 안 좋다 보니 아빠가 어린 애한테 왜 그랬을까 하면서 원망하는 느낌이 컸다. 굳이 생각을 하자면 아빠 입장도 이해가 되지만 직관적으로 다가오는 느낌은 부정적이었다. 그리고 명상을 계속 하다 보니 그 때 그 기억이 내 첫번째 거절감이었던 것도 차츰 알게 되었다. 그리고 더 돌아보고 빼기 방법으로 마음을 빼기 하면서 부정적인 마음이 덜어지면서 차츰 더 객관적으로 당시 상황이 판단되기 시작됐다. 당시 6살의 나는 기대감이 컸다. 워낙 아빠 그림 함께 보는 시간을 좋아했고 그만큼 내 좋아하는 마음을 가득 담아 아빠에게 전달하면 아빠도 그만큼 좋아하겠지, 행복해 하겠지 라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기대감과 정반대의 반응을 겪으니까 공기 다 찬 풍선이 빵 터지듯이 내 기대감도 그렇게 터져버렸던 거 같다. 그 터진 기대감이 인생의 쓴 맛이었던 거다. 누구나 맛 보아야 하는 인생의 쓴맛. 어릴 때에 쓴맛을 알게 모르게 다 겪는데 나는 거절감이라는 쓴맛을 비교적 어릴 때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명상을 하면서 그 당시 경험은 내가 기대감에 부풀어 있어서 거절감을 느끼게 된 거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시점이 나에게는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 명상을 하면 생각이 바뀌는구나, 손가락을 남한테 향하지 않고 나에게 향하니까 마음이 오히려 편하네. 누군가를 원망하는 건 정말 기운 빠지는 일이네… 라고 생각이 바뀌게 되었다. 명상 방법대로 자신을 돌아보니까 관점이 실질적으로 바뀌는 게 참 대단했다. 그리고 내가 하던 명상의 마음빼기 방법으로 거절감의 뿌리인 기대감을 빼기하면서 더 대단한 것을 발견했다. 그건 바로 내 사고방식, 행동, 말이 자연스럽게 바뀐다는 거였다. 예전에는 당연히 내가 거절감 느낄 일인데 명상을 한 이후에는 거절감을 느끼는 정도와 횟수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예전에는 거절감을 느끼지 않으려고 애를 많이 썼는데 기대감이 없어지니까 거절감을 느끼는 일이 거의 없어졌다. 예를 들어, 예전에는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에 상대방이 내가 좋아하는 것이 별로라고 하면 이 사람이 나를 싫다고 하는 것처럼 느껴지고 내 존재가 우리 관계에서 존중받지 못 하는 것 같고 내가 거절을 당하는 느낌이었다. 머리로는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거절감이 훅 하고 들어올 때면 나는 속수무책이었다. 그리고 그 거절감이 상처가 되어서 오랫동안 마음을 앓기도 했다. 그런데 명상 이후에는 내가 좋아하거나 제안, 추천하는 것을 상대가 탐탁치 않게 생각하면 우선 반응이 “아 정말? 왜 그런데?” 라고 궁금해 지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훅 하고 들어오는 거절감 때문에 정신을 못 차려서 대화를 이어나가지 못 하는 경우가 많았던 거에 비하면 너무나 큰 발전이었다. 그리고 상대가 좀 공격적이거나 호불호의 선을 확실하게 그으면서 이야기를 해도 기분이 상하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 라는 생각이 들고 그걸 내가 말로 하지 않아도 상대가 먼저 느끼는 경우가 많았다. 누군가 먼저 이해심으로 다가가면 상대방도 이해심으로 반응하는 경험을 자주 하게 된다. 기대감도 알고리즘이 있는 것 같다. 관계 또는 대화를 하면서 기대를 갖게 되면 상대의 반응을 짐작하게 되고 그 짐작대로 되면 굉장히 들뜨고 짐작대로 되지 않으면 필요 이상으로 큰 실망감 또는 거절감이 느껴진다. 그것은 상처가 되어서 회복하는데에 어느 정도 시간이 소요되는데 다 회복되기 전에 비슷한 상황에 놓이면 (100% 놓인다. 집에서 혼자서만 있어도 TV보거나 책보면서 또는 예전 생각날 때 그 생각에 빠지게 되면 비슷한 경험치를 또 쌓게 되는 경우가 거의 다시 생기더라…) 또 상처가 되어서 회복하고 성장하는 데에 걸림돌이 된다. 그리고 기대감을 갖고 있으면 상대는 부담을 느껴서 당연히 반작용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 기대감을 덜어내고 상대를 대하니까 상대 역시 굳이 반작용을 할 필요가 없어지게 된 듯 하다. 상대방이 나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면 1. 상대가 사이코패스 또는 사이코패스와 동급 2. 상대가 나한테 스트레스 해소중 3. 내가 주는 영향에 반응하는 중 … 이렇게 3가지 중 하나일 거라고 생각한다. 1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게 없다. 2도 거의 마찬가지이다. 3은 내가 어떻게 컨트롤할 수 있는 부분이니까 현실가능한 3에 집중해 본다. 내가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전혀 생각지도 못한 포인트에서 원인제공을 하고 있는 경우가 있는데 그걸 알려면 객관적인 시각에서 나를 바라보면 전혀 생각지도 못한 포인트가 무엇인지가 신기하게도 보인다. 운전할 때 있던 사각지대가 후방 카메라 설치 후 훤히 잘 보이듯이 말이다. 혼자서 자기 회고식으로 돌아보는 것과는 전혀 다르게 명상은 객관적인 관점으로 자신을 돌아보게 해준다. 그리고 빼기를 통해서 그 갈등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해준다. 여기에 내가 했던 마음수련의 실체가 있다. 그래서 지금은 기대감 없이 상대에게 말을 건네고 대화를 하다 보니 거절감을 느끼는 경우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최근에 느꼈던 거절감, 마상이 기억이 가물가물한 거 보니 거의 없는 듯 하다. 그리고 거절감이 없으니까 대화를 하는 기회가 늘어나고 내가 대화를 어떻게 해야 효과적으로 할 수 있을지를 더 공부하게 되고 어른이 되어가는 듯 하다. 흔히 말하는 내면아이가 드디어 철이 나서 어른이 되어가는 것 같다. 어릴 적에 아빠가 나에게 잘 해주겠지 라는 기대감이 꺾이고서는 내가 표현하는 호불호나 제안에 대한 상대방의 반응에 필요 이상으로 거절감을 느끼던 것이 없어지고… 그 자리에는 원래 자연이 그런 것처럼 씨가 뿌려지고 새싹이 나고 성장을 하고 열매를 맺는 것처럼 씨를 가리던 잡초를 빼고 나니까 새싹이 나고 성장을 하고 열매를 맺는 정상 궤도에 들어서게 되었다. 그게 마음수련의 실체인 듯 하다. 원래의 정상궤도에 나를 되돌려 놓는 것. 명상이 없는 삶은 생각할 수도 없을 정도로 큰 도움을 받고 있어서 요즘에도 명상을 계속 하고 있다. 명상은 사각지대에 있어서 발견하지 못했던 부분을 후방카메라가 보여주듯이 훤하게 보여주곤 한다. 그걸 빼고 나면 일탈해 있었던 삶의 한 부분이 정상궤도로 다시 돌아오는 경험을 한다.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성장을 하고 결과물이 만들어지고 주변에 베풀 수 있는 기회도 생긴다. 이렇게 정상궤도에서 살아지는 삶이 행복에 가까운 삶으로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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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겉핥기식 글쓰기보다 실체와 본질을 잘 담고 싶다. 나의 일상, 직장, 가족, 마음수련… 나는 진실을 잘 담고 있을까? 아니면 글에서조차 나의 실체를 감추고 있는 걸까? 가장 드러내보일 수 있는 공간이라고 믿고 펜이 가는 대로… 나의 밝음과 어둠을 모두 적고 싶다. Archives
June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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